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여성신학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는 게 못마땅합니다. 왜 ‘하나님 어머니’는 안되냐고 항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제의 산물이 아니냐고 따집니다. 제겐 만물의 근원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부모가 다함께 자녀 창조의 근원이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통하여 자녀를 낳았다 함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속에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깊은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극복해야 할 분이면서도 연민이 느껴지는 대상입니다. 가깝고 싶어도 왠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요 아무리 친밀해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상입니다. 점점 멀어져가는 존재입니다.
지난주에 동전주노회 목사님들의 독서모임에 초청을 받아서 쉐마교육 강의를 했습니다. 그 모임의 총무 역할을 하는 목사님이 아버지가 시무하시던 교회의 교회학교 학생으로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지금 진안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그분이 초청해서 쉐마교육 강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강의 후에 함께 식사를 나누던 목사님이 제게 그분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젊은 시절의 목사님, 그러니까 제 아버지를 제가 쏙 빼어 닮았다는 겁니다. 강의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똑같아서 놀라웠다고 말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느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이 온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자녀에게 아버지는 지양해야 할 존재이면서도 결국 지향의 대상이 되는 존재입니다. 자녀는 결국 아버지처럼 되어집니다. 아버지에게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서 느그막하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선 분들도 숱합니다. 올해로 100세가 되신 김형석교수님이 97세 때 인터뷰했던 신문 기사가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봤습니다. 이분의 학문적 동료이면서 친한 벗이었던 김태길교수와 박종홍교수를 언급했습니다. "내 친구 김태길 선생은 말년에 딸을 슬프게 잃었어요. 그런데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그분의 슬픔을 철학과 윤리가 해결을 못해줍니다. 그분도 결국 신앙으로 돌아왔지요... 서울대학교 박종홍교수는 지성 성, 이룰 성, 거룩할 성의 3단계를 이야기하며, 이 길이 철학에서 종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지요. 내가 살아온 나날을 훑어봐도 내 선택이 아니라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몇 십년을 학문적으로 두드린 후에 내린 결론이지요." (조선일보 2016.8.27.) 아버지로서 백년 가까운 세월을 지낸 분이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분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저도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딸 셋을 키우고서 겨우 막내 아들을 얻었는데 넷째 소식을 들었을 때 딸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딸을 좋아했던 제가 막내 아들을 얻고서 아들은 딸과는 또다른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막내여서 그런지 아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운 ‘아들 바보’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커서 저를 아버지라 부르고 제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양가의 감정을 그대로 갖겠고 누군가가 보기에 젊은 저를 빼닮았다고 하겠죠. 그렇게 이땅에서 가정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묘한 부자관계를 겪고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됨을 연습해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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